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마모토 이소로쿠 (문단 편집) === 사망 === || [[파일:W-Profile-1-HT-Nov12-1.jpg|width=100%]] || [[파일:atrgdonzsucz.jpg|width=100%]] || |||| 사망 사흘 전, [[라바울]]에서 촬영된 사진 || 1943년 1월 말에서 2월 초, [[과달카날 전역]]이 일본군의 참패로 끝난 뒤, 전황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군은 과달카날뿐만 아니라 뉴기니 지역에서도 맥아더의 공세([[코코다 트랙 전투]], 밀른만 전투, 부나-고나 전투)에 밀려서 동부 뉴기니의 동남부 일대를 포기했다. 이로 인해, 솔로몬 일대와 뉴기니 지역에서의 주도권은 연합군이 가져갔으며, 뉴기니 지역의 일본군에겐 동부 뉴기니 북쪽 내륙과 해안 지대의 방어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동부 뉴기니를 잃어버리면 남태평양의 핵심 거점인 라바울이 위협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동부 뉴기니 방면에 병력 증원을 기도 했지만, [[비스마르크해 해전|이 시도를 알아차리고 단단히 준비한 연합군에 의해 수송 선단이 증발하고 증원 병력의 절반이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가 1943년 3월 3일. 수송 선단의 끔찍한 피해도 피해였거니와 이때를 기점으로 연합군이 공세에 나설 조짐[* 비스마르크해 해전이 벌어지기 전인 2월 21일, 미군은 과달카날 서북쪽의 러셀 제도를 점령하여 전진기지를 만들었다. 미드 [[더 퍼시픽]] 중반에 렉키 일행이 휴양하였던 파부부가 바로 여기에 있다.]이 보이자 야마모토는 연합군이 공세에 나서는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춰야 한다는 강박감에 짓눌렸다. 조급해진 야마모토는 지상기지의 항공기뿐만 아니라 [[산타크루즈 해전]] 이래 재건 중이던 항모기동부대 소속 함재기 부대들까지 총동원하여 과달카날과 뉴기니의 연합군 지역에 대해 대규모 항공 공격을 가했다.(이호 작전: 1943년 4월 7일 ~ 4월 16일[* 일본군이 공식적으로 작전 종료를 선언한 날. 실제 공격은 14일이 마지막이었다.]) 야마모토는 40척에 달하는 연합군 함선을 격침 또는 파괴하고, 180대에 가까운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 또는 파괴하였다는 작전 결과를 보고 받고는 만족해했다. 하지만 이 전과는 터무니 없이 부풀려진 것으로, 실제로 연합군이 입은 피해는 일본군이 보고한 것의 7분의 1에 불과[* 과달카날과 뉴기니 일대의 연합군 피해 합계는 함선 6척, 항공기 25대였다.]했다. 실상 연합군의 전투력은 서슬 퍼렇게 살아있었지만[* 이호 작전 당시, 부건빌을 작전권에 두고 있는 과달카날의 미군이 입은 피해는 전투기 7대에 함선 3척에 불과했다. 이호 작전 직전에 일본군이 과달카날의 미군 전투기들을 꾀어냈을 때에도 겨우 6대만 잃었을 뿐이었다. 이호 작전 당시 과달카날에서 출격한 미군 전투기가 총 76대 였으므로 이호 작전 종료 후에도 최소 69대의 전투기가 과달카날의 미군에게 있었다는 얘기이다. 일이 이렇게 된 건, 미드웨이 해전 당시처럼 이호 작전도 과달카날과 뉴기니 일대의 미군을 모두 제압하겠다는 과도한 목표 때문에 전력이 분산되었던 데다, 초기에 과달카날을 공격한 일본군 조종사들의 '함선 15척 격침/대파, 적기 41대 격추'라는 과장된 전과 보고를 곧이곧대로 듣고 과달카날에 대한 공격을 그대로 끝내버린 야마모토의 실책 때문이었다.] 과장된 전과 보고를 그대로 믿은 야마모토는 그 당시 솔로몬 해역 일대의 일본군 최전선 기지가 있던 부건빌 섬 행차를 최종 결심한다. 부건빌 섬의 바로 코앞에는 동남쪽으로 솔로몬 제도가 이어져 있었고, 제도의 남쪽지역엔 이젠 미군의 핵심 작전기지가 된 과달카날이 있었다.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는 예정대로 [[부건빌]] 섬으로 전선시찰에 나섰다. 문제는,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극비였지만)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거의 실시간으로 완벽에 가깝게 해독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전간기 군축조약 협상할 시절에 이미 [[미국]]은 [[일본 정부]]의 암호를 해독해서 재미를 보았다. 나중에 낌새가 있다고 [[독일]]에서 일본에 알려주었지만, 일본은 큰 대비를 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미국]]은 여전히 [[일본군]]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 때의 유명한 식수 타령은 최종 확인을 위한 작업이었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 전에 [[진주만 공습]]조차도 모호하지만 일본이 무언가 하고 있단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이건 연합군이 암호를 너무 잘 뚫은 것도 있다. '''[[독일]]의 [[에니그마]] 암호도 [[영국 본토 항공전]] 무렵에 [[앨런 튜링]]이 참여한 [[GCHQ|GC&CS]]에 의해 이미 줄줄 새고 있었는데도 독일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크릭스마리네의 암호는 조금 더 버티고 중간에 한번 방식을 바꾸기는 했는데 그것도 뚫어버릴 정도. 아닌 게 아니라, 그것 때문에 U보트 함대 작전이 와해됐다.] 일본인 2세로 구성된 미 해군 군사정보대 하와이 기지가 4월 14일 대본영이 관계 지역에 타전한 야마모토 시찰 스케줄을 감청하였던 것이다. 일차로 해독한 암호는 전체 내용 중 15%에 불과했지만 거기에 적힌 것은 야마모토의 '''방문지와 도착 시각'''이었다. 시찰 며칠 전에 야마모토의 비행 일정이 입수되자마자, 이 '''초[[대박]] [[월척]]'''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Operation Vengeance(복수 작전)"으로 명명하고 즉시 추진하였다.[* 사실, 처음에는 해당 정보의 신뢰성에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알래스카와 다른 하와이에서도 같은 정보가 들어오자 정확성을 인정받았다.] [[진주만 공습]]의 주인공이었던 야마모토는 [[일본]]에서의 범국민적인 위상과 인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그만큼 [[미국]]에 있어서는 원수 중의 철천지 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를 제거하면 [[미군]]이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향후 암호 해독을 통한 정보 입수 루트가 차단되는 극심한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때문에 단순한 군사작전일 수 없었던 이 작전은 '''[[미 해군]] 장관''' 프랭크 녹스는 물론,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결재까지 받아야만 했다. 루스벨트의 선택은, '''어떠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야마모토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단, 이 부분은 공식적인 기록이 없으며, 시간 정황상 니미츠 제독이 홀시 제독의 일차적인 작전 브리핑을 받고 녹스 장관은 니미츠 제독의 결정권을 넘겼을 가능성이 크다. 암호 문건 NTF131755은 1943년 4월 14일에 발신 되었으며 니미츠 제독이 작전을 승인한 것이 1943년 4월 17일로 3일간의 갭에 킹 제독→녹스 장관→루스벨트 대통령의 각료회의까진 무리가 있기 때문. 야마모토의 목적지인 부건빌 섬 부인(Buin) 일대의 비행장 상공은 당시 미군의 최전선 비행장이었던 헨더슨 비행장([[과달카날]])으로부터 미군 전투기들의 행동반경 안에 있었다. 이를 우려한 연합함대 참모들은 부건빌 시찰을 계속 만류했으나, 야마모토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시찰 계획이 확정된 뒤엔 현지 항공대 지휘관이 [[호위기]]를 더 배치하자[* 6대에서 20대로 증강]고 하였으나 야마모토 본인과 참모진이 이를 만류하였다고 한다. 아군 기지에 가는데 그렇게 유세떨 거 있냐는 이유였다. 이외에도 호위기 세력을 적게 가져간 데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과달카날 전역 후반부부터 솔로몬 제도의 미군 항공 전력이 계속 강화되었지만 솔로몬 제도에서 본격적인 공세 작전, 특히 과달카날 전투가 끝날 때쯤 본격적으로 가동한 부건빌 남부지역 일대의 비행장에 대한 지속적인 압박을 수행하기에는, 이 당시의 미군에게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있었다. 일단, 1943년 3월 시점에서 솔로몬 일대 양측의 항공 전력은 아직 미군이 수적으로 열세였다.[* 일본 390(+150) VS 미군 319(+200)] [[비스마르크해 해전]]의 결과에 놀란 일본 육군이 라바울을 비롯한 솔로몬 일대에 배치한 육군항공대 전력 200대를 전부 철수시켜서 뉴기니로 돌려버리면서 수적 우세가 바뀌었지만[* 이로 인해 이호 작전 당시 야마모토가 솔로몬 제도 일대에서 동원할 수 있는 항공 전력이 말그대로 반토막 났고 이 때문에 항모부대의 항공 전력까지 끌어다 작전에 투입해야 했다.], 제공권 장악에 필요한 전투기 전력의 경우, 미군의 주력 전투기들은 제로센에 성능적으로 열세인 [[F4F]], [[P-40]], [[P-39]]가 주력이었고, 제로센에 성능상 우위를 가진 [[F4U]], [[P-38]]은 배치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숫자가 부족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일본군의 항공 전력에 대적할 수 있는 전력만 따져보면 수적 열세는 여전했다. 거기에다 미군 전투기의 행동 반경은 과달카날에서 부건빌까지의 직선 코스로 비행할 때 가능한 행동반경이었으며, 이 코스는 솔로몬 제도 한복판을 따라 올라가는 코스이기도 했다. 때문에, 과달카날을 제외한 솔로몬 제도와 그 일대 해역 대부분을 여전히 차지하고 있는 일본군에게 발견되기 딱 좋았으며, 이들의 조기경보를 받은 부건빌의 일본군 전투기들은 미리 요격에 나설 수 있었다. 과달카날 전역 당시 부건빌보다 먼 라바울에서 출격하여 행동반경 끝에 있던 과달카날에서 불리한 전투를 강요받던 일본군이 처했던 상황이, 이 당시 부건빌을 노리던 미군이 처했던 상황과 비슷했다. 실제로 미군은 1943년 2월에 당대 최신형 전투기였던 [[P-38 라이트닝]]과 [[F4U 콜세어]]의 호위하에 부건빌에 대한 폭격을 시도했으나, 수적 열세와 지상 및 해상에서의 조기경보로 인해 큰 피해만 입은 채 실패한 바 있었다.[* 이후에도 미군의 작전을 엄호하기 위해 일본군 비행장들을 공습하곤 했지만 이는 일시적으로 일본군 항공 전력의 발을 묶기 위해 이뤄진 작전이었다. 미군 항공 전력이 지속적인 공세에 나서는 건 신형 전투기들의 세력이 확충된 43년 중반부터의 일이다.] 이 상황에서 벌어진 이호 작전으로 인해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실제 사정은 전혀 달랐지만) 미군 항공 전력이 대 피해를 입었으므로 당분간 미군이 항공 작전을 벌이기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이호작전 당시에도 미군이 출격시킨 항공 전력은 일본군이 투입한 전력보다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일본군의 폭격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일본 해군항공대의 질적 저하[* [[과달카날 전역]]을 거치면서 일본 해군항공대의 베테랑 조종사들 대다수가 사라졌고, 이 자리를 대신 차지한 신참들은 과장된 전과 보고의 예에서 보듯이 전반적인 기량과 자질이 크게 떨어졌다. 주력 전투기인 제로센은 미군의 신형 전투기들에게 성능적인 열세를 보이면서, 이 신형 전투기들과 연계 작전을 벌이는 구형 전투기들조차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게 된다.]가 아니었다면 상술한 과장된 전과 보고가 상당 부분 실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이 시점에서 부건빌 상공의 방공 작전은 일본군에게 유리하였으므로, 설령 '이호 작전으로 인해 세력이 약해진' 미군 전투기들의 위협이 있다 해도 부건빌보다 먼 곳에서 미리 막을 수 있다는 게 당시 일본군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호 작전의 '대전과'와는 별개로 솔로몬 일대의 일본군 항공 전력도 피해를 입어서 재정비 중이었던 데다 이호 작전을 위해 파견되었던 부대들도 모두 원대 복귀해서 전체 전력이 줄어든 사정에 지휘관 순시 같은 일회성 이벤트에 대규모 전력을 동원하기엔 부담스러웠기도 했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이호 작전에서 미군이 입은 피해는 적어서 '''미군의 항공 전력이 여전히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던 데다''', '''[[P-38 라이트닝]]'''이 당시 P-38용으로 막 개발되어 배치되던 신형 대용량 보조 연료탱크[* [[P-38 라이트닝]]이 많이 쓰던 보조 연료탱크의 용량은 150갤런인데 반해, 이 신형 연료탱크는 그 2배인 300갤런짜리였다.]까지 가득 채울 경우, '''일본군의 눈을 피해 솔로몬 제도를 우회한 경로를 취해도 부건빌 상공을 행동반경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야마모토 이하 일본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미군은 "복수 작전"으로 명명한 이 계획을 [[육군 항공대]]가 맡도록 지시하고 [[마크 미처]] 제독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공격 임무는 P-38을 주력으로 운용하는 육항 347 비행단 소속 339 비행대대가 담당하였다. 미처 제독과 현장지휘관 존 미첼 육군 소령은 339 대대를 포함하여 당시 과달카날에서 P-38을 운용하던 3개 전투 비행대대들[* 347 비행단 소속 339 비행대대와 70 비행대대, 그리고 18 비행단 소속 12 비행대대][* 핵심 임무라 할 수 있는 전체 편대 선도조 및 야마모토 공격조는 거의 대부분 339 비행대대로 채워졌다.]로부터 최상의 기체들과 조종사들을 엄선하여 며칠 간 극도의 보안 속에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라바울에서 출발한 야마모토 일행의 수행단이 [[G4M]](베티) 폭격기 2대 + 호위 전투기 [[제로센]] 6대의 편대라는 사실까지 알아낸 미군은, 18대의 P-38[* 이 숫자도 나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게 이호 작전 중 과달카날 공습 당시 요격을 위해 출격한 P-38은 12대였다. 과달카날 공습이 끝난지 1주일만에 더 많은 숫자를 동원했다는 건 공습과 암살작전 사이의 그 짧은 기간에 전력이 보강되었거나 아니면 애초에 예비 전력이 충분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이 당시 과달카날 후방의 미군 기지에는 200대의 각종 예비 기체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답 안 나오는 상황이다.]를 출격시키로 결정했다. 이 중 14대가 호위 제로센 6기를 상대하는 사이, 나머지 4대의 P-38이 2대가 한 조를 이루어 폭격기 1대씩을 최대한 신속히 격추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의 조기 경보와 요격을 피하기 위해 솔로몬 군도 남서쪽 50마일까지 저공 비행한 후 부건빌 방향으로 이동하고 부건빌 근처에 도달하면 부인 비행장 방면으로 침투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 작전의 핵심은 P-38의 체공시간이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부건빌 상공은 미군기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먼 지점이었는데, 거기다 육상(섬)과 해상(초계정)으로부터의 탐색을 기만하기 위해 솔로몬 제도 남쪽 멀리 돌아서 2시간 넘게 아슬아슬하게 초저공 비행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신형 대용량 보조탱크를 동원'''[* 이 330갤런 신형 연료탱크는 막 일선에 배치되고 있어서 수량이 모자랐기 때문에 야마모토 제거 작전에는 대당 1개씩만 장착되었고 나머지 한쪽엔 원래 쓰던 165갤런 연료탱크를 달았다.]'''해도 부건빌 인근 상공에서 P-38이 매복할 수 있는 시간은 10~15분 남짓이 전부였다.''' 수행단이 조금만 일찍 또는 늦게 도착하면 그대로 작전은 실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야마모토의 철저한 시간 관념'''을 알고 있던 미군은 비행 스케줄에 맞춰 수행단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대로 작전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야마모토는 '''자신의 그 철저한 성격 탓에 목숨을 잃었다.''' 한편 야마모토는 기함 무사시에서 출발하여 라바울로 이동하여 육군 상황을 점검하였다. 이때 라바울 지역 지휘관 또한 연합함대 참모들과 마찬가지로 부건빌로 가는 일정의 취소를 요청했으나 야마모토는 무시하고 이를 강행하였다. 사실, 일정 강행이 잘못된 게 아닌 것이 상술한 바와 같이 당시 부건빌 일대의 제공권은 여전히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데다 암호 체계가 변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설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4월 18일 오전 7시 20분, 헨더슨 비행장에서 미첼 소령의 지휘하에 18대의 P-38이 이륙하였다. 그러나 공격조에 속했던 2대가 이륙 중 기체 이상으로 탈락했고, 공격조는 2대만 남게 되었다(토마스 랜피어 대위, 렉스 바버 중위). 이 때문에 예비조의 2대(베스비 홈즈 중위, 레이먼드 하인 중위)가 공격조에 편성되었다. 오전 9시 34분, 2시간의 초저공 비행 끝에 부인(Buin) 비행장 인근에서 1만 피트 상공으로 급상승한 16대의 P-38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경로로 이동 중인 수행단 일행을 1분 만에 발견했다. 그 즉시 연료탱크를 버리고 급가속하며 달려들었지만, 이 때 예비조의 P-38중 1대(홈즈 중위)의 연료탱크가 분리되지 않아 하인 중위와 함께 이탈하여, 최초 교전한 P-38은 14대(호위기 상대 12대 + 수송기 공격 2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숫적으로도 여전히 우위였을뿐더러, 호위 제로센 조종사들이 다가오는 P-38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거리가 1마일 이내였을 정도로 철저한 기습이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35분, 조용하던 하늘에서 순식간에 난전이 벌어졌다. 토마스 란피어의 P-38이 호위기를 가로막는 사이 렉스 바버 대위가 2대의 폭격기를 뒤쫓았다. 2대의 폭격기는 허겁지겁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급강하하며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폭격기인 G4M으로서는 작정하고 달려드는[* 당시 작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조종사들은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자신이 맡은 극비 임무가 얼마나 위험하고 또 막중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폭격기 공격조는 자신이 격추되는 한이 있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무를 성공시키겠다고 다짐했다 한다.] 최신형 고속전투기 P-38를 따돌리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먼저, 야마모토가 탑승했던 1대의 G4M이 P-38의 집중사격을 받고 밀림에 바로 추락했다.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제독이 탑승한 나머지 1대의 G4M은 최초 교전 시작 당시 이탈했다가 문제를 해결하고 재합류한 예비조 P-38 2대 및 1번기 격추 후에 달려온 바버 중위의 공격을 받고 해상에 불시착한 직후 가라앉았다. 야마모토 탑승기는 탑승자 11명 전원이 전사, 우가키 탑승기에선 우가키 제독을 포함한 3명이 격추 직후 달려온 단정에 구조되었다. 우가키 제독은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 후 회복했다. 폭격기 2대를 모두 격추한 사실을 확인한 모든 P-38 조종사들은 그 즉시 고속으로 상승하며 퇴각하였다. 바로 코앞의 부인 비행장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경실색한 일본 육군 전투기들이 벌떼같이 [[긴급발진]]하였지만, 고속상승이 주특기인 P-38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미 육군기들의 기동은 신속했다. 이 전투에서 미 육군의 손실은 두 번째 G4M에 달려든 예비조의 P-38 중 1대가 격추된 것이 전부였다. 피격된 기체의 조종사 레이먼드 하인(Raymond K. Hine) 육군 중위도 전사했으나, 렉스 바버(Rex T. Barber) 육군 중위가 G4M를 격추시켰다. 일본 해군 측 손실은 폭격기 2대가 전부였다. '''폭격기 2대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느냐가 매우 심각한 문제였지만.''' 육공기의 추락 소식을 전달받은 일본 연합함대는 패닉에 빠졌다. 추락 다음날 함대 참모 와타나베가 비행정에 탑승해 추락 현장을 확인하고 수색대를 파견했지만 수색대는 추락 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후 육군에 연락하여 6사단 소속 [[보병포]][[중대]] 병력을 추락 현장에 파견하였다. 지휘관 하마쓰나 육군 대위는 신원 확인을 시도했지만 죄다 불타버려 식별이 불가능 했고, 간신히 비행화나 단화에 적힌 이름으로만 누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부조종사 좌석에 앉은 야마모토의 시신을 확보하여 부건빌 육군 기지로 운구하였다. 조종사들이 귀환한 헨더슨 비행장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2대의 G4M을 모두 격추시켰으므로 그 중 어느 것에 야마모토가 타고 있었는지 여부는 [[미군]]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작전은 완벽히 성공하였다'''. 미군은 이 작전의 성공이 '대전투의 승리'와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했으며, 실제로 '''야마모토의 죽음은 [[일본군]]과 국민들에게 엄청난 사기 저하를 가져왔음'''이 종전 후 확인되었다. 전후, [[미군]]이 [[일본군]]의 서류를 조사하자 야마모토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진상이 드러났다. 야마모토는 2대의 G4M 중 먼저 격추된 (정글에 추락/폭발한) G4M에 탑승해 있었다. 일본 육군은 그 즉시 추락 지점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항공기를 통해 추락 지점에서 발생한 화재를 통해 위치를 어느정도 파악한 뒤 수색병력을 투입했다.] 워낙 빽빽한 정글이었던 탓에, 24시간이 지난 뒤에야 야마모토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색팀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폭격기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화재의 범위 바깥의 나무 아래에 의자채로 튕겨나와 폭격기를 등진 채 [[군도(도검)]]를 꼭 쥐고 앉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추락한 비행기에서 튕겨나온 시신이 어떻게 그런 자세를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이 있다. 근처에 죽어 있던 군의장이 추락 이후에도 살아있었고, 그가 야마모토의 시신을 품위있는 자세로 고쳐놓고 죽었다는 설과, 야마모토가 추락 이후에도 생존해 있었으며, 살아있었으나 부상이 심했기에 자신이 살 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힘을 다해 자리에 앉은 후 죽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혹은 야마모토도 다른 시신들과 다를 바 없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그를 영웅화하기 위해 그의 죽음을 각색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일본군이 야마모토의 사망을 발표할 당시 일본군의 공식 발표로는 왼쪽 어깨 아래 등으로 들어간 관통상 하나, 그리고 왼쪽 턱 아래로 들어가 오른쪽 눈으로 나온 것으로 보이는 관통상 하나가 있어서 후방에서 가해진 총격 혹은 그것에 의한 파편이 치명상을 입혔다고 하였다. 이대로라면 '''전투기 총격 직후에 사망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사망 시기와 관련해서는 일본군 내에서 엇갈린 기록이 있어서 후대에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상세는 아래 항목 참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Yamamoto_state_funeral.jpg|width=100%]]|| ||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장례식 || 야마모토의 시신은 현지에서 4월 21일 [[화장(장례)|화장]]되어, 자신의 마지막 기함이었던 전함 [[무사시]]에 실려서 일본으로 운구되었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국민과 군의 사기가 떨어질까봐 사망 사실을 숨기고 문제의 전투를 "해군 갑(甲) 사건"이라는 암호명으로 부르다가 한 달 뒤에 화장한 유골이 일본에 도착하자 그때서야 사망 사실을 일반에 공개하고 영웅 대접을 했다. 장례는 6월 5일에 [[요나이 미츠마사]] 제독을 위원장으로 하여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원수(계급)|원수]] 칭호[* [[일본]]에서의 원수는 계급이 아니라 칭호다. [[원수(계급)|원수]] 항목 참조.]가 추서되었으며, 동맹국 [[독일]]에서는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보내왔다. 지금까지 외국인 중에서 이 훈장 서훈자는 야마모토 제독이 유일하며, 또한 하위 훈장을 받지 않고는 위 훈장을 받을 수 없는 철십자장 수훈 제도[* 쉽게 말해, 백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기 위해서는 최하위인 2급 철십자 훈장부터 시작해 하위 철십자 훈장들을 모두 받아야 한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 등 다른 비 [[독일인]] 수훈자들은 모두 2급, 1급 철십자 훈장 수훈 후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를 따르지 않은 특례를 인정한 유일한 수훈 사례이다. [[파일:external/nichirei-reien.jp/tama-reien09.jpg]] 야마모토의 유해는 [[러일전쟁]] 시절 쓰시마 해전의 영웅이며,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바로 곁에 안장되었다. 이곳은 일본에서도 명사들이 다수 묻힌 [[도쿄]] 타마레이엔(多磨霊園)에 위치한다. 일본에서 야마모토 제독의 신사를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평소 그의 성격을 잘 알던 해군 원로 요나이 제독이 "그의 영혼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한편 [[미국]]은 암호 감청 및 해독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고 작전의 실체를 속였다. 암살 작전에 참가한 조종사들에게 실시한 브리핑에서는 암호 감청 및 해독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대신에 연합군 해안 감시원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점령지 안에는 미처 철수하지 못한 연합군 병력들이나 현지 거주민들이 일본군의 눈을 피해 일본군의 동향을 감시하여 연합군에 보고하고 있었다.]의 보고에 의해 야마모토의 행방을 파악했다고 얘기했다. 작전이 끝난 뒤엔 야마모토 탑승기의 격추와 관련된 조종사들의 보고를 전부 기밀에 부치고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그냥 침묵만 지킨 게 아니라 해당 작전이 통상적인 작전 중에 우연히 일어난 일인 것처럼 꾸몄다. 작전 2일 뒤에 미군의 대일본 선전 방송[* 일본에서 일부러 들으라고 일본어로 방송.]은 "부건빌 인근에서 전투기가 호위 중이던 폭격기들을 발견하여 폭격기 2대와 전투기 2대를 격추하였다."라고 수많은 전과 선전 사이에 짤막하게 방송하였다. 거기에다 이 작전 이후에도 전투기들을 부건빌 상공으로 계속 보내서 마치 암살 작전이 있었던 그날부터 미군이 부건빌 상공에서 통상적인 작전을 시작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다만, 암살 작전에 참가한 조종사들은 이 기만작전에서 배제되었다. 혹여나 포로가 되었다가 암살 작전의 내용이 흘러들어 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일본]]이 한 달 뒤 스스로 야마모토 제독의 사망 사실을 실토하였지만, 6월 17일에 미국 방송이 앞서의 선전 방송과 별 다를거 없는 브리핑을 내놨을 뿐, 야마모토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일본군]]은 암호 해독을 강력히 의심했지만, 그 확증이 필요했다. 그래서 매우 그럴 듯한 거짓 정보를 흘려 미군기들을 유인함으로써 확인하려 했으나, 이를 간파한 미군은 이를 철저히 회피하였다. 결국 일본군의 진상 조사 노력은 흐지부지되었고, 이 작전의 구체적인 전모가 공개된 것은 전후의 일이다. || [YouTube(sy9rGAO-qfc?start=219)] || || {{{#fef200 '''미국 애니메이션 [[루니 툰]]의 프로파간다 에피소드인 Tokio Jokio.'''[br]야마모토는 '백악관에 가서 평화 협정을 맺자'고 주장하는 모습으로 희화화된다.}}} || [[미국]]이 야마모토를 죽인 이유가 야마모토의 '호전성'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백악관]]까지 진격해서''' 미국과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는 게 그 이유. [[진주만 공습|한 번의 결정적인 승리]]로 미국과 평화 협정을 맺는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이니, '''[[반어법|미 본토를 점령해서 백악관까지 진격할 능력이 없으면 개전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는데, 이게 와전돼서 미국 점령을 획책하는 광인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아예 야마모토가 이 발언을 하고 있는 미국의 전시 선전 포스터([[https://www.reddit.com/r/PropagandaPosters/comments/odsls8/american_propaganda_poster_featuring_isoroku/|#]])도 나왔다. 영화 [[도라 도라 도라(영화)|<도라!도라!도라!>]]에서도 저 대사가 나오는데, 미국판의 자막은 그냥 순화시켰다.] 하지만, 사실 미국이나 일본의 대본영이나 야마모토의 발언의 진의는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미국은 진주만 이후 일본에 대한 국민적인 항전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서, 대본영은 연합함대 사령장관 씩이나 되는 인물이 이런 약한 소리를 했다는 게 알려지면 사기 등에 부정적인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일부러 양쪽 모두 야마모토의 호전성을 부각하는 형태로 프로파간다를 했다는 의견이 많다. 물론 어차피 전쟁과 전투에서 군인은 기본적으로 '살해'의 대상이다. 더구나 야마모토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있어 특히 중요한 고위장성이었으므로, 제거할 기회가 있으면 제거하는 게 당연하다. 다만, [[진주만 공습]]의 주인공이면서 + 덤으로 저런 발언까지 한 야마모토가 [[미군]]에게 있어 좀 더 각별한 제거 목표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참조 링크 1: [[http://blog.naver.com/imkcs0425/60093366597|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 - 야먀모토의 최후(1)]] (작전 배경) * 참조 링크 2: [[http://blog.naver.com/imkcs0425/60093436327|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 - 야먀모토의 최후(2)]] (세부내용 및 그 후의 결과) 참고로 위 참조 링크에서는 후술된 전공 논쟁과 관련하여 토마스 랜피어를 지지하고 있다. 전공 논쟁의 상세는 아래 항목 참고. * 참조 링크 3: [[https://youtu.be/smMjyIJPMNI|당일 작전 과정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동영상]] 아래는 야마모토 사망 발표 이후의 미국의 뉴스 보도와 전후 일본의 다큐멘터리 영상이다. 다만 이 작전에 참가한 P-38들에는 건카메라가 없었으므로[* P-38 라이트닝에 건카메라가 부착된 건 1943년 후반기에 나온 후기형 기체들 부터이다.] 격추 장면들은 다른 전투에서의 격추 영상이 들어가 있다.[* 특히, 일본쪽 다큐멘터리 영상 중 일부는 전쟁 말기에 자살특공기 오카를 탑재한 G4M을 격추하는 장면이 들어가 있다.] 건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 전과를 누가 거두었는지를 두고 지리한 논쟁이 벌어졌다. 상세는 다음 항목 참고. 실제 전투 장면이 없으므로 두 영상 모두 의도적인 연출로 보이는 장면이 많고, 편집과정에서 등장 기종이 오락가락한다. 본 사건에 대한 미일 양측의 시각을 참조하는 정도로만 보자. [YouTube(39-yZ_2aao0)] [[일본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2011)에서의 피격 장면. 영화적 연출 때문에 피격된 폭격기가 꽤 오래 활공하는데, 실제로는 집중 사격을 당한 직후 추락했다. 또한, 제독 일행이 후술할 해군 제3종 군장이 아닌,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혀 다른 피복인 사관용 육전의를 입고 있는 고증 오류가 있다. [YouTube(iNNEj5-6aOk)]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